2013. 2. 8. 22:08ㆍ탐조/2013년
2월 5일 쇠동고비, 돌곶이습지, 노숙
돌곶이 습지에는 물새들이 잠을 자는 곳이다.
예전부터 이 곳은 습지의 크기는 넓지 않지만 놀랍게도 넓은 갈대밭에 수많은 철새들이 찾아왔었다.
그러나 재작년에 이 곳에 롯데명품프리미엄 아울렛이 들어섰고 나는 그 공사로 인해 습지가 완전히 망가진 줄 알았다.
공사가 진행 중이였던 겨울에는 꼴랑 1마리가 왔었다고 하지만 (다른 분이 확인함) 공사가 끝나고 작년에 내가 미국에서 돌아온 후 한번 확인해보니 예전에 비해 습지가 달라진 점이 많았긴 했지만 여전히 많은 철새들이 잠을 자러 찾아오는 것을 확인했다.
나는 돌곶이습지에서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는 새들을 촬영할 계획을 오랫동안 해왔다.
여태동안은 사진을 찍어왔지만 이번엔 영상으로 말이다.
아빠 친구한테서 빌린 캠코더는 가정용이라 아쉽게도 망원이 굉장히 짧은 관계로 내가 원하는 장면들을 찍으려면 잠자는 기러기들에게 가까이 접근해야하고
잠자는 기러기에게 가까이 접근하려면 위장텐트 속에서 하룻 밤 자는 방법 밖에 없었다.
아침에 자고 있는 새들에게 가까이 맨 몸으로 접근하여 찍으려고 하면 새들이 날아가니 불가능하고 결국 위장텐트 속에 들어가는 수 밖에 없는데 위장텐트 안에 들어가는 것도 새들이 습지에 날아오는 오후 4시, 5시 전에 미리 들어가서 다음 날 아침까지 있어야하는 것이다.
밖에서 잠을 자본 다는 건 어떤 걸까? 집 밖으로 나가면 개고생이란 말이 있다. 물론 힘들겠지 하지만 여태까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 한 노숙이라는 것을 해본다 생각하니 왠지 모를 짜릿함과 모험심이 솟는다.
나는 오랫동안 이 촬영을 해보고 싶어했다. 그 동안 캠코더가 없었지만 아빠 친구분께서 감사하게도 빌려주셨고 친구 아빠께선 침남을 빌려주셨다.
습지에서 하루 밤 자려고 한다고 말을 하면 주변 사람들은 위험하다고 말리려 하셨다. 하룻 밤 노숙하는게 뭐가 위험하냐고? 추위다.
추위 외에는 내가 걱정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안타까운 뉴스지만 실제로 서초구의 한 경찰분 께서는 동사를 하시지 않았던가.
그 뉴스는 내게 지금 날씨가 어느정도 수준인지 깨닫게 해줬다. 그래서 나도 날씨가 어느정도 풀려질 때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일기예보를 보니 내일까지는 영하 4도 정도이고 내일 모레부터는 영하 10도로 내려간다고 하니 더 미룰 수가 없었다.
여태까지 계획한대로 옷은 아주 여러 겹으로 껴입고 침낭, 텐트, 촬영장비, 식량을 챙기고 밖으로 나섰다.
난 이 짐들을 탈곡하고 남은 커다란 쌀포대에 담아서 챙겼는데 이 짐들을 들고 버스를 타기엔 좀 무리가 있었다.
딱 밖으로 나오자마자 보이는 쇠동고비.
아... 저 녀석을 안 찍고 갈 순 없다.
다시 짐들을 집에다가 두고 쇠동고비를 관찰했다.
무슨 일인지 이 겨울에 흠뻑 젖은 쇠동고비. 여기 물 고여있는 곳도 없는데...
참새.
쇠동고비는 2마리가 왔다.
눈을 먹는 쇠동고비.
눈을 녹여서 물을 마시는 거겠지?
쇠동고비들이 날아가고 나서 다시 짐을 챙겨 나가려는 순간 삼촌에게서 전화가 왔다. 생일선물을 가져다 주려고 하는데 집에 있나는 것이다.
커다란 쌀포대기를 옆구리에 힘겹게 들고 있는 내 모습을 본 삼촌은 나를 보자마자 바로 차에 타라고 하셨다. 와우, 완전 감사하다.
돌곶이습지까지 나를 데려다주신 삼촌은 도와주실 수 있는 건 모든지 도와주려 하셨다. 감사하게도 말이다.
나는 며칠 전에 위장텐트를 미리 이 습지에다가 설치를 해두고 갔다. 그래야 새들이 내 위장텐트에 익숙해져서 무서워하지 않도록 말이다.
설치해둔 내 위장텐트에 들어가서 이제 하루 밤을 보내기만 하면 되는건데 가까이가서 보니 큰 문제가 생겼다. 텐트는 그대로 있는데 텐트가 물에 잠겨있던 것이였다.
오메 이럴수가 이게 뭔 일이냐. 내가 텐트를 여기다가 설치할 때만 해도 여긴 평평한 땅이였는데 말이다.
아마 눈이 내리고 나서 수위가 오른 모양이다. 아..... 이거 완전 망했다.
헛웃음만 계속 나온다. 허허허
일단 텐트를 걷어냈다. 걷어내는 과정에서 텐트 일부가 찢어지기도 하고...
하하 이거 혼자 왔으면 완전 큰일날 뻔 했는 데?
텐트를 차에다가 싣고 습지 건너편 잔디공원으로 갔다.
습지 바로 옆에 붙어있는 공원인데 사람도 많고 바로 옆에는 클래식 음악과 히터가 빵빵하게 나오는 화장실도 있다.
아쉽지만 난 이 곳에서 텐트를 새로 펼치고 잠을 자기로 했다.
촬영을 목적으로 하기보단 일단 위장텐트 안에서 잠자는 걸 경험하는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그래야 위장텐트 안에서는 어떤 행동을 조심해야하고 잠을 잘 땐 어떤지 등을 알 수 있으니까 말이다.
예민한 기러기들을 가까이서 촬영할 계획이였으니 위장텐트 속의 행동을 훈련할 필요가 있었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말을 하시고 삼촌은 떠났고 이 잔디공원에는 나와 위장텐트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좋아 이왕 결심하고 오랫동안 계획 해왔던 일. 끝까지 해보는 거다.
쌀포대를 바닥에 깔고 텐트 안에 들어가보니 생각보다 훨씬 아늑하고 좋다.
습지 한 가운데에 위장을 하고 있었던 거라면 텐트 안에서 나오지 않았겠지만 사람들이 많은 잔디공원에 펼친 나는 밖에 나와서 시간을 보냈다.
이 긴 시간을 뭐하면서 보낼 것이냐.
내 텐트는 위장텐트이긴 하지만 온 세상이 하얀 지금 겨울과는 색깔이 맞지 않는 텐트였다. 오히려 눈에 띄는 바람에 위장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 하는 텐트라
나는 위장텐트 앞에 눈 벽을 쌓기로 했다. 새들이 습지로 날아오려면 시간도 많이 남았다.
심심한 차에 시간도 많겠다. 손에 장갑을 끼고 당장 텐트 주변으로 눈을 쌓기 시작했다. 눈벽으로 텐트를 가리면 그나마 좀 나을 것이다.
난 그렇게 눈으로 장난치는 어린애 마냥 한 시간동안 눈벽을 쌓았다. 정말 오랜만에 눈 가지고 놀아본다.
짜잔~~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나.
이글루처럼 다 덮어버리고 싶지만 그러진 못 한다.
새들이 습지로 날아올 때 쯤 눈벽도 완성되었다. 위장텐트 속에 들어가 새들이 날아오는 모습을 지켜본다.
기러기들이 한 두마리 씩 습지로 날아온다. 이상하다. 이 시간 때쯤이면 떼를 지어서 날아오는데 말이다.
위장텐트 안에서 무료해진 나는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도 밖에서 기러기 날아오는 소리만 들리면 밖에 기러기가 날아오는지 확인했다.
그러나 6시가 지나도 기러기들은 날아오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설마 내 위장텐트 때문에 그럴리는 절대 없는데.
텐트 안은 생각보다 아늑하다.
다행히 기러기들은 가로등이 해를 대신 하는 시간이 되자 떼를 지어 날아왔다. 오늘은 좀 늦었을 뿐이구나.
어둠 속에서 들리는 기러기 소리가 어마어마하다.
근데... 지금부터 뭐하지? 해는 졌지만 아직 잠을 자는 시간이 아니다. 난 평소에 밤 늦게 자는데 그때동안 뭘 하란 말이냐.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보송보송 천천히 내리던 눈이 비처럼 내리는 폭설로 변했고 나는 캠코더를 들고 산책을 하면서 눈이 내리는 풍경을 동영상으로 담았다. 연습 연습.
거리를 혼자 돌아다니면서 빵집에 들어가 빵도 하나 사먹고 이리저리 걸어다니다 결국 텐트 안으로 들어간다.
침낭에 몸을 넣으려 했지만 잠바와 옷을 너무 두껍게 입은 탓에 몸이 쏙 들어가질 않는다. 애매하게 들어가서 더 불편하다.
그래도 춥지 않은게 어디냐. 다만 텐트가 너무 좁아서 발을 쭉 못 피고 자는 것이 너무 불편했다.
배고프다.. 내일 먹을 빵에 손이 간다.
에이 일단 먹고 보지 뭐.
평소에는 빵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 순간에 먹는 빵은 왜 이리 맛있냐. 이런 게 군대의 초코파이 같은 걸까.
먹는 순간만큼은 참 행복했다.
잠을 자기 위해서 몸을 구부리고 자세를 바꿔보고 주변의 짐 정리도 다시 해보고 여러 짓을 해봤지면 편안한 자세가 나오지 않았다.
이 짓을 새벽 1시까지 반복하며 노력했지만 잠을 도무지 잘 수가 없었다.
아.. 가능하면 텐트 안에서 자보려고 했는데..
하는 수 없다. 화장실로 가서 자는 수 밖에.
침낭을 들고 공원에 있는 화장실로 간다. 그세 눈이 많이 쌓였는지 발이 아주 쑥쑥 빠진다.
이 공원 화장실은 쓰는 사람도 많지 않은데 내가 가본 공용화장실 중 시설이 제일 좋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켜지는 자동문과 화장실 스피커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클래식 음악과 천장에 에어컨에서는 빵빵한 히터가 틀어져 나온다.
내가 만약 노숙자가 된다면 이 곳에서 살겠다.
아무튼 침낭을 피고 바로 쓰러진다.
햐. 발을 피고 자니까 살만하구나.
온 몸이 피로에 쩔어있지만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계속 잤다가 깼다가 잤가다 깼다가 비몽사몽을 반복하다보니 어느새 해가 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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