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 12. 00:14ㆍ탐조/2016년
1월 제주도 여행1
첫날
성산게스트하우스 - 송당리 보리게스트하우스 (짐풀고) - 용눈이오름 - 다랑쉬오름 - 아끈다랑쉬오름 - 다랑쉬굴 - 보리게스트하우스
둘째날
보리게스트하우스 - 산굼부리 - 제주시 - 한경면 바람의정원 게스트하우스 (짐풀고) - 용수저수지 - 해안도로 따라 게하까지 걸어오기
셋째날
바람의 정원 게스트하우스 - 모슬포항(짐 맡기고) - 덕승식당 - 알뜨르비행장 - 모슬포항 - 제주시 - 제주공항
제주도 조사가 끝나고 3일 동안 제주도에 남아 혼자 여행을 했다. 사실 이어지는 낙동강 조사 때까지 머무르고 싶었는데
8일날 의경 시험이 있어서 7일날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의경으로 뽑혔다고 한다ㄲㄲㄲ)
이제부터는 혼자다. 혼자가 된 느낌을 제대로 완성 시키기 위해 휴대폰의 데이터도 꺼놓았다.
첫날 숙소인 보리게스트하우스에 일찍 도착하여 짐을 맡겼다.
이 게하를 선택한 건 두 가지 이유에서 였다. 하나는 오름들과 가깝다는 것. 또 하나는 하루에 한번 20km 이내까지는 픽업 또는 샌딩을 해주기 때문이다. 오름들을 돌아본 후 픽업은 아쉽게도 시간이 맞지 않아 타지 못 했지만 떠나는 날 샌딩 서비스 덕분에 산굼부리까지 차를 타고 편안하게 이동했다. - 송당리로 도보여행을 갈 일이 있다면 이 곳을 추천한다.
날이 흐렸다. 심하진 않았지만 비가 조금씩 내리는 탓에 우산을 먼저 사야 했다. 동네 길 중심부에는 낡은 슈퍼마켓이 하나 있었었다. 그곳에서 다이제 하나와 곧 있으면 무너질 듯한 건물과 대비되는 고급스러운 우산 하나를 샀다. 남아있는 게 이것 뿐이라고 한다.
송당리에서 용눈이오름까지는 걸어가기에는 멀고 차 타고 가기엔 가까웠다. 애매하다. 돈도 아낄 겸 버스를 타고 갈까 고민하는 내 앞에 택시 한 대가 내 앞에 섰다. 창문을 내린 기사는 택시를 타고 가는 것이 시간도 아끼고 경제적으로도 이득이라며 열과 성을 다해 나를 꼬시려 했다. 기본요금으로 갈 수 있는 거리인데 한 시간에 한 대 오는 버스를 기다리는 것이 한심한 것이라는 대목에서 살짝 기분이 나빴으나 그의 의견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어서 탑승했다. 말 많은 기사님답게 이렇게 비 오는 날 오름에 뭐 하러 올라가냐는 참견이 이어졌지만 적당히 대꾸하고 말았다.
오름 중에서도 용눈이오름을 가장 좋아한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인가, 학교에서 제주도 여행을 온 적이 있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남아있는 장소 중 한 곳이 여기다. 당시 찍힌 사진 속에서 반팔을 입은 걸 보아선 여름이었던 거 같은데, 바람이 강했다. 정면으로 팔을 벌리고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여도 넘어지지 않았다. 그 만큼 강했던 바람에 놀란 기억이 있다. 그 날 종다리 1개체와 대형 수리과 맹금류 2개체가 내 머리 위를 낮게 날아 지나간 것도 기억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주에서 여름을 난다는 그 독수리들이지 않았을까 싶다.
어릴 적 기억대로 용눈이오름의 바람은 위력이 강력했다. 그때와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오늘은 비를 동반하는 점… 사람들이 아무도 없어서 오름을 혼자 독차지 할 수 있었던 건 좋았지만, 수직이 아니라 수평으로 몰아치는 비바람 덕분에 바짓가랑이가 흠뻑 젖어야 했다. 한 걸음 한걸음 걸을 때마다 발가락 사이로 흐르는 빗물이 찝찝함의 극을 찍었다.
빗물에 젖은 양말과 신발을 벗어 제끼고 따듯한 물과 이불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았지만 아직 둘러보고 싶은 오름들이 남았다. 우선 용눈이오름 옆에 있는 다랑쉬오름이다. 지도를 보며 찾아갔다. 거리가 멀지 않다. 길에는 사람도 없고 추적 추적 내리는 빗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조용하다. 이 세상에 나 혼자 남은 듯 했다.
빗줄기가 차츰 줄어들자 직박구리와 박새를 비롯한 새들의 소리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관목지대를 낮게 날아다니는 새매와 말똥가리도 눈에 띈다.
다랑쉬오름으로 가는 길에 ‘다랑쉬굴’ 이라고 적혀있는 조그만 표지판이 있었다. 차를 타고 있었으면 못 봤을 표지판이다. 거리가 2km 정도라 망설여졌는데 이런 평야에 동굴이 있다니 흥미가 생겼다.
조그만 시골길을 따라 걸어가 도착한 다랑쉬굴은 기대했던 자연동굴이 아니라 제주 4.3사건 당시 11명의 주민들이 숨어있다가 군인들에게 발견되어 학살당한 유적지였다. 굴 입구를 콘트리트로 막은 후 불 연기로 질식사 시켰다는 조그만 설명문과 함께 당시 현장의 흔적이 남아있는 조그만 굴이 옆에 있었다. 잠시 추모..
6인실인 방에는 운 좋게도 밤 10즈음까지 나 혼자 뿐이었다. 비에 젖은 옷도 빨고 말리고 운동하고 노래까지 크게 튼 상태로 샤워하는 안락함을 누렸다. 내 방처럼 사용할 수 있어서 만족. 다음 여행을 이어갈 준비를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저녁은 게하 주인아저씨가 추천하는 동네 함박스테이크 집에 가는 걸로 결정했다. 음식, 교통 정보는 현지인에게 물어보는 게 제일이다. 워낙 외진 동네라서 조그만 분식집일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알려준 길대로 가보니 맨발 슬리퍼에 위아래 츄리닝 입고 가기엔 망설여지는 고급 레스토랑집이었다. 좀 당황했다. 이런 동네에 이런 식당이.. 7천원짜리 예상했는데 가격이 16,500원... 여행 중에 먹는 음식에는 돈을 아끼지 않기로 했다. 냠냠
먹다가 찍은거라 비주얼은 더럽지만 훌륭한 맛이었다..!
밤 11시까지 열어 놓는 숙소 휴게실은 투숙객들이 아침 식사를 하는 자리이기도 하며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넓은 평상에 방석들이 놓여있었다. 책꽂이에는 옛날 만화책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 김세영 작가의 포커 겜블러 만화 <타짜>를 집어 골랐다. 한 권.. 두 권.. 젠장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멈출 수가 없었다. 각 조직의 브레인을 담당하고 있는 두 주인공이 치열한 두뇌싸움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 소등시간에 걸려서 끝까지 읽지 못 했다. 똥 싸다 끊긴 찝찝함… 내일은 내일의 일정이 있기에 그만 자기로 했다.